혁신이라는 말이 지나치게 소비되고 있다. 자기 말만 하기로 유명한 대통령도 입만 열면 혁신타령이다. '혁신'은 '생존 전략'이라 했다 한다. 그가 말하는 '혁신'이 정치지도자의 언술인지 어느 기업주의 그것인지 알 수가 없다. 아마 본인도 잘 모를 것이다. 돈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혁신의 동력은 특허와 독점을 통한 초과이윤 확보에 있다. 산업혁명 이후 지난 200년의 역사는 시장이 '혁신'을 내세우고 자본이 그 성과물을 독차지했다. 그 욕망을 중심으로 현재의 정치, 경제 시스템이 구성되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세먼지는 공해를 과학으로 포장한다. 대량생산의 과실은 전취하면서 파괴적 폐해에는 책임지지 않는다. 21세기의 젊은이들은 그들의 부모세대보다 더 가난한 미래를 맞았다. 아이엠에프에 금융위기에 세금으로 되살려 놓았더니 이번엔 조선 해양산업이 대규모 구조조정을 앞두고 있다. 자본의 방종은 생활인의 눈에만 보이지 않을 뿐 곳곳에서 횡행하고 있는 적나라한 현실이다. 스마트폰 시장이 포화에 이르러 애플의 시대가 갔다고 한다. 물론 또다른 애플은 등장할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 그 주인공은 스티브 잡스나 마크 주커버그의 선한 얼굴 만은 아닐 것이다. 인공지능과 알파고는 환상적이지만 돈 앞에서 더 위험해 보인다. 2016년은 안팎으로 그런 위기의 시대다.  

 
 

혁신은 가치 중립적이지 않다. 인류의 삶에 기여하지 못하는 한 혁신은 한낱 미사여구에 불과하다. 화려한 수사를 벗겨내면 언어는 얼마나 빈약한가? 역사상 가장 무능력한 정부가 '탑-다운식 혁신'을 추진하겠다는 주장 만큼, 혁신이란 어느덧 닳아 빠지고, 위태로운 그 어떤 것에 불과하다. 크고 작은 혁신이 그렇게 계속되어 왔지만 역사가 발전했다고 말할 근거는 부족하다. 평등하고 평화로운 세계를 구성하고자 하는 정당한 요구는 철부지 푸념에 불과한 것처럼 느껴진다. 폭력이 오락처럼 소비되고 만연한 가난에 눈감은 세계를 우리는 예사로 지내고 있다. 

그동안 공공부문이 이룬 혁신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20세기초까지 혁신은 주로 정부나 군대와 같은 공공부문이 주도 했다. 도시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공중위생 시스템을 발전시키고 사회주택과 같은 공공서비스와 복지국가의 개념을 도입한 것도 그 예다. 오늘날 기술혁명의 기반이 된 인터넷의 발명 역시 공공부문에서 나왔다. 그러나 시장에 '혁신'이라는 단어의 용법을 내어준 다음, 그 다음이 없다. 그동안 인류가 이루어온 발전이란 무엇이고 '혁신'의 성과물은 모두 어디로 사라졌나? 무언가 근본적으로 잘못된 기반 위에 우리가 놓여져 있는 것은 아닐까? 심각하게 되물어야 한다.

 
 

국가에 대한 인식, 정부의 역할과 서비스에 대한 기대는 시대에 따라 변화할 수 밖에 없다. '정치'는 그 시대의 과제를 찾고 공공의 역할을 설정하는 창조적 과정이다. 변화무쌍한 민주주의의 공간에서 한 발 앞서 기획하고 미래지향적인 리더십을 발휘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정치가 '창의' 넘치는 예술이어야 하듯, 무겁고 비효율적인 ‘관료화’야 말로 공공의 존재이유와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원칙적으로는 분명히, 그렇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다. 정치는 세력과 당파, 그들만의 세계에 갇혀 꼼짝달싹 못하고 있고 관료가 세상의 변화를 따라잡지 못하는 건 당연한 일이 되었다.

작동하지 않는 리더십의 핵심에 칸막이를 만들고 그 틀에서 사고하는 그 '관료적'이고 폐쇄적인 태도가 있다. 사람들의 행위와 관계를 둘러싼 논리는 간단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와 시장은 오직 한가지, 이윤의 동기만 ‘합리적’인 것으로 전제한다. 소유의 관념은 ‘절대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일상의 삶을 오직 특정한 방향으로만 재단하는 현재의 시스템은 사람들의 이해와는 전혀 다른 목표에 셋팅되고 설계되어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 시스템 안에서는 '저항' 조차 '사치'로 느껴진다. '세월호'의 경우처럼 비교적 간단한 재난적 상황에도 국가는 속수무책, 실패를 반복할 것이다.

 
 

‘사회혁신’의 모티브는 이러한 문제의 인식에서 비롯되었다. 사회혁신은 ‘사회(Society)’의 혁신이 아니다. 사회혁신은 비영리 또는 시민사회 영역에서만 운위되는 ‘부문’의 과제가 아니다. 이 시대가 무기력하게 마주하고 있는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해법을 찾는 모든 것이 사회혁신의 자세다. 실질적이고 실천적인 문제해결 역량을 추구하기 때문에 사회혁신은, 지금까지 시스템이 구축해 놓은 것들의 새로운 조합 또는 그 ‘경계 밖’에서 작동할 수 있어야 한다. 기성의 권위와 위계를 뛰어넘는 ‘소통과 협력’이 없다면 불가능한 작전이다. 그래서 ‘소셜(Social)’혁신 이다.

거버넌스, 협치(協治)가 운위(云謂)되는 것도 이 지점이다. 협치는 단순히 권한을 나누어 그 일부를 다른 쪽으로 이양해주는 시혜적인 것이 아니다. 협치는 너-나-우리 모두가 바뀌어야 하고 일의 가치, 목표, 프로세스 등 시스템 전체를 새롭게 설계하는 일이다. 선도(先導) 의제는 있을 수 있지만 협치해야 하는 부문와 그렇지 않은 일이 분리될 수 없다. 사회혁신은 신선해 보이는 '아이템들'의 조합이 아니라 작동하지 않는 시스템을 움직이게 하는 매뉴얼을 만들고 숙련하는, 고난의 과정이다. 

 
 

청와대와 세 당이 회의 한 번 했다고 '협치'라 한다. 아이러니 하게도 가장 불통의 시대, 가장 무기력한 시대에 '협치'와 '혁신'의 단어가 소비된다. 권력을 나누는 것 조차 아니니 '협치'는 애당초 이름하지 말았어야 할 오기(記)였을 뿐이고, '혁신'은 정부 스스로 존재이유를 반성하는 차원에서 사용되어야 했다. 인생은 언어의 한계를 깨닫는 시간인 듯 하다. 개념도 쓰임도 모두 제각각이어서 인간이 지구를 나누며 살아내는 이 순간이 다만 기적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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